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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를 만들고 나서 

- 2021년 3월 / 글. 박지윤


'아주 오래전에'라는 아주 짧은 5분짜리 실험 영화가 과거의 기억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에 생긴 안 좋은 기억들이 현재에 어떻게 다시 떠오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에서 빠져나오는지에 대한 시각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영화는 결국 '자존감'에 대한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영화라기보단 현재에 대한, 미래에 대한 영화다. 내가 한 과거의 '기록'이 어떻게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서 자기 치유의 기능을 하는지, 어떻게 현재의 나를 구원하고 회복하게 하며 계속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다룬다.

어떤 일에 대한 기분이 너무 복잡하거나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냥 생각나고 느끼는 대로 그것들을 일기로써 적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읽지 않을 오직 나를 위한 문장들이었으며 그래서 어쩌면 더 불완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과 더 가깝고 지나친 생각의 회로를 거치지 않은, 진짜 그때의 나를 제대로 담은 것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자주 썼다. 고등학생 땐 잠시 쓰지 않았지만 20대가 되며 다시 종종 쓰기 시작했고, 2016년 봄부터 좀 더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손으로 쓴 것들은 워드로 쳐서 구글 드라이브에 제대로 모아놔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좀 귀찮아서 잠시 쉬기도 했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울 땐 노트에 그렇게 적는 게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과정'은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는 어떤 '시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 일기들을 자주 읽거나 찾아보거나 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쓰는 과정 자체가 일기라는 결과물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가끔 생각이 날 때나 그때 뭘 썼나 궁금해지면 찾아보곤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읽어보면 그때 쓴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때 썼던 것들에 더 이상 동의를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일기장에 쓴 문장들이 시간이 지나 현재의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읽히고 그게 어떤 위로나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기록의 힘을 다룬다. 그리고 이 기록의 힘이 자존감, 즉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를 믿는 어떤 감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도 물론 필요하며, 때때로 나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때도 많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잘 달래고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고, 자기 치유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오래전에 내게 했던 말들, 썼던 것들 그 기록의 시간이 가진 힘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내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아주 개인적인 영화지만 일기를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 좋은 말을 해주는 건 어쩌면 더 쉽다. 내 스스로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어렵다. 아주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젠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싶다. 우리 자신을 가장 제대로 알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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